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28) 내장산 비자림은 사계절 짙푸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비자나무에서 굴하지 않는 의지를 배우고
다투지 않는 겸손을 터득하고 싶다”

[식품저널] 계절 가릴 것 없이 기회가 날 때마다 내장산을 찾는다. 천년의 연륜이 함께하는 비자림 숲의 청정공기를 마시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가 사는 오늘의 삶을 조용히 되짚어 본다. 고요하고 한적한 원적암에 들러 보는 이 없어 외로워 보이는 목단 꽃과 얘기를 나누고, 항상 영겁의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고자 함이다. 또 하나, 어머님의 체취와 모습을 회상할 수 있어서다. 오래전 생존해 계셨을 때 이곳에 오셔서 떨어진 비자 열매를 한 톨 한 톨 주우시며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어제 일 같이 눈에 선하고 아늑하기 때문이다.

내장산이 알뜰히 품어 키우고 있는 비자나무 숲, 아름드리 나무들이 실한 가지를 뻗어 천년의 모습대로 의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나무 옆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적어도 500년은 되었으니 앞으로 오는 500년을 거뜬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이 긴 세월, 한 곳에서 풍상을 견디고 이겨, 오늘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비자나무들, 그 기를 느끼기 위해 팔 벌려 안아본다. 나무가 나에게 주는 신령스러운 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경외스런 마음이 솟는다.

이은상 시인의 비자림은 “장군봉 등 너머로 눈 퍼붓던 날 비자림 푸른 숲이 더 좋더구나”의 정경인데, 새순이 막 돋아나는 늦봄의 비자나무도 또 다른 살아있는 생동감을 준다. 한겨울 모든 활엽수가 여름의 짙푸른 잎을 떨어뜨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서 있을 때, 비자나무만 푸른색을 하나도 변하지 않고,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추위를 견디고 있는 모습이 변치 않는 의젓함을 온 모습으로 표현한다. 겨울의 모진 추위에도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그 어디 가서 배울 것인가. 같은 장소에서 또 한 해를 맞고, 오는 새해를 준비하는 비자나무에서 100년도 채 채우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삶을 뒤돌아본다.

지금 마주한 비자나무는 조선 초기에 엄지 손마디만 한 씨가 이곳에 떨어져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이 나라 모든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기다림의 시간이 쌓여 이 거목이 되었다. 매년 보면서 느끼는 비자나무는 별로 커졌다고 느끼지는 않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켜켜이 쌓여 오늘에 이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 지나온 햇수를 셈하고 있으니, 이 어찌 신비하지 않겠는가.

모든 나무의 특성이지만 씨에서 돋아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순간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자라면서 계속 씨를 맺어 후손을 남기는 노력을 한다. 인간은 20년 정도에서 성장을 멈추고 노쇠의 길로 들어서는데,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남겼고 앞으로 할 것을 스스로 셈해 보지만 이 자연에, 이 사회에 도움 되게 남긴 것이 허술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에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몇 아름도 넘을 한 거목에서 의젓함과 당당함,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할 일만을 꾸준히, 한 치의 흩트림 없이, 주어진 일을 하는 모습에서 많이 배워야 하지 않을지.

흔히들 존경하는 인물을 우리는 거목에 비유한다. 큰 나무의 모습과 같이 모든 외풍에 의젓이 당당히 견디며,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고 본분을 지키며, 자기의 굳은 의지를 지켜나가는 모습이 큰 나무를 닮았기 때문이다. 작은 씨에서 시작한 거목의 전 과정을 인간 삶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 주위에 거목을 닮은 인재들이 많아 모두에게 교훈을 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오늘 당장 계산된 잇속에 매몰되어 다음 이어지는 날의 나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유도 없는 삶, 그래서 하루살이를 닮아가는 세태에서, 비자나무의 의젓함은 더욱 빛을 발하고 이를 닮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생명을 유지하고 거동이 가능한 날까지 계속 내장산을 찾고, 비자나무와 반갑게 인사하고 교감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이 나무에서, 굴하지 않는 의지를 배우고, 다투지 않는 겸손을 터득하고 싶구나. 물론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이 바자나무 숲에 계속 내 후손이 찾아와 내가 느끼고 생각하면서 존경했던 마음을 이어서 품었으면 한다. 석화광음몽일장(石火光陰夢一場), 짧은 삶이지만 이 순간만은 이 비자나무같이 천년을 갈 것으로 믿고 싶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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